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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불안 / 알랭 드 보통 저 - 불안을 알면 불안을 이길 수 있다

SeaLine 2012. 10. 25. 23:00




불안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이레 | 2005-10-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영국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신작으로 지난 2천년간의 철...
가격비교



■ 원인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을 하고 부산을 떠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인가? 

그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 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 이 내용만으로는 결국 삶의 조건 개선이 사랑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사람은 노력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하지만 꼭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일까? 위에서 생활필수품이라고 했는데 작가는 생횔필수품의 갯수가 얼마나 많은지 인지하지 못한듯 하다. 무의미하게 남을 쫒을 수도 있고 자기만족도 있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3 기대
1959년 7월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미국의 기술과 물질적 성취를 전시하는 박람회를 개최하러 모스크바로 갔다. 이 박람회의 핵심은 미국의 보통 노동자의 가정모습을 그대로 전시. 빈틈없이 깔린 카펫, 거실의 텔레비전, 욕실 2개, 중앙난방 시설, 부엌엔 세탁기, 회전 건조기, 냉장고...
소비에트 관영 언론은 보통 노동자들이 도저히 이런 호사스러운 집에 살수 없다며, 이 전시 전체를 선전물로 보아야 한다고 맹비난. 그리고 그들은 전시장을조롱하듯 '타지마할'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기대를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철거해 버렸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물질적 평등을 성취할 수단이 없는데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하다고 느꼈다. 토크빌은 말한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부자의 쾌락에 희망과 질시가 섞인 눈길을 던진다." 가난한 시민은 부자 시민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했으며, 언젠가는 그들의 뒤를 쫒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늘 틀란 것은 아니었다.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났지만 큰 부를 일군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예외가 규칙이 될 수는 없었다. 미국에도 여전히 최하층 빈민이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기대를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기대의 시대 [8~10]
민주주의 > 기대 심리를 높이는 출판물의 발전 > 매스미디어의 발전 > 광고의 발전 > “종교는 사후의 행복을 보장하지만 광고는 내세에서의 행복을 보장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1776)에서 "근대 사회에서는 아무리 지위가 낮고 가난한 노동자라해도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기만 하면, 과거의 어떤 야만인이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많은 생활필수품을 손에 넣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장-자크 루소에 따르면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었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얻을 수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광고는 비참한 것이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4장 능력주의

#실패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옛이야기 세가지
중세나 근대 이전
성직자, 귀족, 농민 세 계급
첫째,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둘째,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셋째,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불안을 일으키는 새로운 성공 이야기 세 가지
첫째,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 문명 전체, 그리고 사회의 복지는 불필요한 자본을 축적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 점을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을 통해 설명해놓았다. "그들은 이기심과 탐욕을 타고났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의 편리만 추구하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의 편리만 추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의 만족뿐이지만, 결국 부자들은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마치 땅을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분배하며, 그 결과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고 종의 증식 수단을 제공한다."

둘째,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 19세기의 많은 개혁들과 마찬가지로 칼라일이 원하던 것은 모두가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불평등한 세상이었다. 칼라일은 말한다. 유럽은 진정한 귀족제를 요구한다. 다만 이것은 재능의 귀족제가 되어야 한다. 가짜 귀족제는 지탱될 수 없다." 칼라일이 원하던 것은 능력주의 사회였다.
능력과 세속적 지위 사이에 신뢰할 만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 늘어나면서 돈에도 새로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능력주의 시대를 맞아 정의는 부만이 아니라 빈곤의 분배에도 관여하게 된 것이다.

셋째, 가난한 사람은 죄가많고 부패 했으며 어리서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부와 가난의 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19세기의 사회진화론 철학보다 분명하게 표현한 사상은 없을 것이다 영국의 사회진화론자 허버트 스펜서는 <<사회 통계학>>(1851)에서 생물학적 원라 자체가 자비라는 개념과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스코틀랜드 의사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 self-helf>>(1859)에서 궁핍한 젊은이들에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신중하게 돈을 쓰라고 권한뒤,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돕는 정부는 비난했다.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거부 앤드루 카네가 역시 자선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복지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뭔가 맞는 말이지만 씁쓸하고 읽으면서 화도나는 내용들이다. 기회가 열려있다구 ? 그럼 왜 사람들은 그걸 피부로 느끼지 못하나? 학벌, 지역감정, 친척 등은 과연 옳다는 것인가 ? 그래서 그런걸 못하고 없는 사람들, 처음부터 출발선이 달랐던 사람들은 몹쓸인간이란 말인가? 오히려 더 초조하고 불안만 가중되는 내용이다. 3장의 기대는 독자를 이해 시키며 끝냈는데 4장 능력주의는 사실적 근거만 나열해 놓았다.


5장 불확실성

불확실한 요인들
전통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지만, 그 지위를 잃는 것 또한 어려워 행복할 지경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누구이냐는 것이다.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
1.변덕스러운 재능
2.운
3.고용주
4.고용주의 이익
5.세계 경제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인 매력 때문에 가끔 물질적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한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18세기 후반에  부르주아지. 감상을 배제하는 공리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은 종업원을 탐욕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으며, 그들의 가족을 배려하지 않았고, 아픈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눈을 말똥망똥 뜨고 있는 어린 아이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다.

카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정, 기사도적 열의, 속물적인 감상주의의 드높은 환희를 이기적인 계산의 차가운 물에 담가버렸다.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경제학은 노동자를 오직 일하는 동물로만 본다.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요구만 남은 짐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노동자는 ( 원료,기계와는 다르게 ) 고통을 느낀다
기계는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한탄하지 않는다. 석탄 사용을 중단하고 천연가스를 사용해도 도태된 에너지 자원은 절벽을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의 가격이나 존재를 줄이려는 시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습관이 있다. 노동자는 화장실에 들어가 흐느끼기도 하고, 실적 미달에 대한 두려움을 술로 다래기도 하며,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경제적 요구 (사업가 이윤의 실현) vs 인간적 요구 (피고용자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

고용의 불안정은 돈 때문만이 아니다. 사랑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무슨 일을 하느냐)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 되는 것. 문제는 그 '일'이 시장 경쟁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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