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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 로맹 가리 - 동심, 현실, 마법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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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 로맹 가리 - 동심, 현실, 마법사

SeaLine 2018. 2. 17. 03:28

2017.10. 읽음





#동심
첫 부분들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판의 미로> 이런 판타지 영화들이었다. 상상으로 채워진 라브로보 숲. 그건 아이에게 실재하는 세상이고, 대화 상대이며, 악당이면서도 친구이다. 이 책에 '동심'이라고 직접적인 단어가 나오진 않지만, 포스코 자가의 어린 시절은 동심으로 가득하다. 동심의 뜻을 찾아보면 '어린이의 마음'이라고 나온다. 특별히 '상상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어린이의 마음' 자체로 '순수'와 '상상'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이다. 순수성에 기반한 스토리텔링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첫 선물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주는 첫 시련은 그걸 다시 거둬가는 일인가 보다. 


#마법사
자가 집안은 그런 상상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펼쳐서 먹고 사는 일명 마법사들이다. 그래서 아버지 '주세페 자가'는 막내 '포스코 자가'의 상상력을 칭찬한다. 예전의 마법사는 광대, 예언자, 점성술사, 약사 등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에 상상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해왔다. 자가 집안은 그걸 이용해서 러시아 여제와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고 정치적, 외교적인 집안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포스코는 아버지의 그런 방식이 무너지는 현실을 경험한다. '시대의 변화인가' 아니면 '한계인가'라는 고민 속에서 포스코는 작가를 꿈꾸게 된다. 꿈꾸는 인간, 마법사, 작가가 하나의 플레임 안에 합쳐지면서 글을 쓰는 자신을 신비롭게 포장하고 있다.


#펜과 종이와 잉크
포스코는 집안의 가업을 글쓰기로 승화시킨다. 사랑하는 테레지나의 부탁 때문인지 아니면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시대적 요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글을 통해 집안과 테레지나와 라브로보 숲을 불멸하게 한다. 작가 로맹 가리는 포스코를 통해서 이러한 기록의 불멸성을 표현해내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죽어가는 테레지나를 글로 옮겨 살리려는 부분은 절절하면서도 가슴이 미어진다. 작가의 소설, 사람들의 일기. 혹시 우리는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면서 그 이야기가 영원히 살길 바라는 건 아닐까? 나는 잃고, 병들고, 죽어가지만 내 글은 남아, 나의 꿈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건 아닐까.


#테레지나
오, 사랑하는 테레지나. 테레지나는 엄마이자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 남자의 로망을 담은 그녀. 하지만 사랑을 한다는 건 유년기를 잃는다는 의미이자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고통은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다. 기록으로 사랑을 영원히 살아있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랑의 행복을 추억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 왜 그 괴로움을 기록해서 계속 유지되길 원하는 것일까? 괴로움도 사랑인가? 아픔도 추억인가? 우리는 알 수 없는 감정을 가진 존재. 그래서, 그래서 상상력의 마법이 이 시대에도 살아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실
상상을 파는 직업이라도 현실의 무게는 냉혹했다. 로맹 가리는 시민혁명이 활발하던 시기를 다루면서 많은 비유와 상징으로 서술한다. 이탈리아, 러시아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지만, 그 뉘앙스만은 눈치챌만하다. 그래도 좀 더 알고 있었으면 유쾌하게 떠들고 욕하면서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든다. 역사적인 현실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도 잘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와 한 여자에 대한 사랑. 그 모든 것이 현실의 벽을 만나 뭉개지고 가로막힌다. 우리는 그 벽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한다. 작가 로맹 가리도 이 작품 이후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되었다니 더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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